국어사전은 회상(回想)을 “지난 날들의 추억이나 일들을 돌이켜(回) 생각함(想)”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 우리 시드니 한인사회의 추억들을 회상해 보고자 합니다.  

아마 부모님 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그 옛날 가난하고 고달팠던 왜정시대와 동족상잔의 현장이었던 6.25사변 등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월남파병과 관련된 시절을 혹은 젊은 시절 중동으로 외화벌이를 떠났던 추억을 회상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도 세월과 함께 제 젊은 시절의 순간들을 떠 올리곤 합니다. 특히 필자와 같은 전형적인(?) 한인 1.5세대들은 주로 1970년대 까까머리 중고등학생 시절 부모님을 따라 무작정 시작한 이민 초창기 인종차별 및 언어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고생했던 시절이 생각나실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제 가슴속 아련하게 남아 있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40-50여 년 전 시드니 한인사회와 관련된 추억들이 많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 시드니 한인사회는 지금과 같이 각 지역마다 한인 식품점이나 마트들이 즐비했던 시절이 아니었으며 센트럴 근처의 ‘고려식품’이 유일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주말마다 넘치는 한인신문들과 잡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전무했으며 그나마 이민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은 모두 ‘고려식품’에서 다른 교민들과 교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한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며 한국식당으로는 킹스크로스에 있던 ‘코리아 하우스’가 유일했으며 특히 태극문양의 입구가 지금도 필자의 기억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1980년대 초중반으로 기억하는데 캠시의 ‘만리장성’에서 먹었던 짜장면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 레드펀에 위치한 시드니 대학 뒷편의 ‘순흥반점’과 에쉬필드의 ‘신동양’이라는 중식당이 ‘만리장성’을 대신하여 우리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 주었던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또 1980년대 초반 젊은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주 애용하던 한국계 나이트 클럽으로는 라이카트에 위치한 ‘흑란’이란 식당(?)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흑란’이란 식당의 위상(?)은 40여 년이 지난 요즘 시드니에서 유명하다는 그 어느 클럽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시설을 갖춘 한국계 나이트클럽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전형적인 식당으로 그리고 또 다른 곳엔 고급 호텔에서나 볼 수 있는 ‘Bar’ 스타일의 음료와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주말이면 라이브 밴드가 고국의 향수를 달래 주었던 그런 대형 클럽이었습니다. 

그 당시 시드니에 거주하시는 부모님 세대 어르신들은 친구분들과 만남의 장소로 또 필자와 같은 20대 젊은이들에게는 대학축제 및 미팅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가끔 이곳에서 친구들과 미팅(?)을 주선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호주이민 초창기였던 1970년대 시드니 한인사회의 종교단체로는 에쉬필드에 있던 한인성당이 기억에 있습니다. 그 성당의 외국인 신부님들 중 특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던 ‘경 신부님’과 ‘황 신부님’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스트라스필드에 위치한 한국계 교회로는 시드니 한인연합교회가 유일했었다는 기억이 있는데 지금과 같이 몇 백개가 넘는 한인교회가 시드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격세지감의 심오한 뜻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불교계의 경우 1980년대 초반 ‘Earlwood’라는 지역에 ‘달마사’라는 한국계 사찰에 모실 불상(佛象)을 보타니 지역에 위치한 세관으로 찾으러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불상이 호주에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금색으로 도금한 불상에 대한 설명을 세관원에게 하던 필자의 젊은 시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970년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 년간 수많은 우리 어머니들이 다음과 같은 직업에 종사를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다방면으로 많은 직업들이 존재하지만 그 당시 우리 어머니들이 주로 하셨던 분야로는 ‘구두공장’ 및 ‘화장품공장’ 그리고 ‘재봉미싱’ 등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아버지들은 지금의 건축업이나 청소 등과 같이 어느 특정분야에만 치우쳐 일을 하셨던 것은 아니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시드니 한인사회의 모든 대소사는 캠시를 위주로 발생했으며 지금과 같이 스트라스필드나 리드컴 혹은 이스트우드는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이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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