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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 크리스찬 뉴스] 호주의 ‘아베 마리아’, 안 정란 권사

우연히 ‘아베 마리아’란 글을 접하게 됐다. ‘글무늬문학사랑회’의 박은우 작가의 글.

‘아베 마리아’는 문자적으로는 '안녕하십니까? 마리아여!'(Hail Mary)란 뜻이다. 수태한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의 문안 인사(눅1:28)와 수태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눅1:42)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마리아’ 같아 보인다는 이야기는 크리스천에게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박 작가에게 ‘아베 마리아’라고 불리는 안 정란 권사.

그는 시드니성결교회(권병만 목사)에 출석하면서 시드니주님의교회(류성춘 목사) 수요예배후 10년이 넘게 매주 노인들을 위해 점심 봉사를 하고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화려했던 젊은 시절의 안 권사를 기억하는 박은우 작가는 처음 시드니에서 안 권사를 다시 만났을때 마음이 아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오페라의 무대에 있을법한 그가 교회 뒤켠에서 밥을 짓는 모습은 꽤 낯설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의 돈도 필요치 않다. 주기도문과 하루 먹을 수 있다면..베풀 수 있는 하루가 있자면 감사할 뿐이다”고 안 권사는 박 작가의 안쓰러운 눈빛에 답했다.

그분 앞에서 우리의 화려한 시절은 사실상 영원하다. 시간이 가고 변화도 변하지 않는것은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이 있기에…

다음은 박은우 작가의 ‘아베 마리아’ 전문. 

 

아베마리아

 박은우/글무늬문학사랑회

 

20대 초반 나는 명동시대를 그녀와 함께 지냈다. 같은 카페, 똑같은 레스토랑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을 뿐 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그 때를 기억하는 청춘들은 코지코너라는 지성인들의 아지트를 알 것이다. 그 곳에서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진 초록이나 붉은 코트를 입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음대를 갓 입학한 그녀와 친구들의 목소리가 우리들 테이블까지 명랑하게 들리곤 했다.

당대에 유명했던 기타리스트들과 친해서 함께 있던 모습이 오비케빈이라는 유명한 경양식 집에서 보이곤했다. 나는 그녀를 ‘아베마리아’라고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를 때 귀티가 났었다. 그런 그녀가 명동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고도 자주 명동에서 친구들과 만나곤 했는데, 아무튼 그녀는 사라졌고 이후 나 역시 두바이로 이주했었다. 족히 12년이 지나서 ‘아베마리아’를 시드니에서 만났다. 그러나 서로 아는 척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교회의 성가대에 있었고 나는 회중에 있었으며 나는 이 교회의 방문자였다. 아서원이라는 한인 식당에서 우리는 마주쳤다. 반갑지만 어색해서 방긋 웃었다. 빛을 가졌던 그녀가 아닌 몽실몽실한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것은 캐나다나 미국에 가 있어야 하는데, 왜 시드니에 살고 있는 것인가, 가족들이 일찍 이민을 떠났고 부모님도 한국에 남지 않았음을 코지코너 여주인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아베마리아는 주일마다 찬송가를 불렀는데 나는 그녀가 짠했다. 지금쯤 오페라의 주인공이 되어 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상집 밥상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게 되었다. 마주 웃으면서 그녀가 언니! 라고 말을 걸었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이 그녀에게 바싹 붙어있었다.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귀염둥이들이었다. 불쑥 물었다. 호주로 시집왔나? 그녀와 나는 종로구 출신들이다. 그녀는 평창동 빨간 기와집에 살았고, 언니, 오빠가 명문대생이었으며, 아버지는 고위급 공무원이었다. 한 때 화려했던 그녀의 모습이 가슴 뭉클 다가와 나는 가슴이 시렸다.

그녀의 호주 삶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트럼펫을 부는 남편은 사진이 잘 받는 그런 인물이었다. 남편은 시드니에 이민 온 사람들이 노동을 해도 그녀는 일의 현장에 나가지 않게 배려해도 될 만큼의 자기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그녀를 많이 보아온 나는 서글프기만 했다.

그녀는 후일 양품점을 열었다. 한국인 식품점과 음식점이 많은 캠시였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가게였다. 캐나다의 언니들은 다 성공적인 가정을 꾸렸고, 오빠는 신문사 사장이며 남동생은 외교관인 그녀의 가족들과 비교되는 이곳 생활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민 생활이 노동이었을 때 그녀의 단독 사업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때, 이민자들은 부족한 사업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계들이 성행했었다. 이 돈이 이민사회에 활력이 돌기도 했던 때다. 아베마리아는 결국 계 파동으로 사업을 접었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승용차로 한시간 반 거리에 살았다. 전원주택이었다. 작지만 그런대로 그녀의 젊은 날의 영화가 베인 보금자리였다. 아들 둘도 잘 성장하고 좀 나이 차이가 있는 점잖은 남편 역시 잘 지내는 듯 했다. 그녀가 빚을 졌다거나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고, 몇 번 나는 그녀와 동행하여 돈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했었다. 그 때의 그녀 모습은 옛날의 화려함이 사라져있었다. 그래도 그녀 특유의 이멜다(필리핀 전 대통령의 부인)의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지런한 서울 말씨에 품격도 여전했다. 주일 예배 때는 화려한 드레스에 찬양을 부르곤 했었다.

“언니, 한국에서 우리는 잘 나갔었지.” 라고 울먹였다.

타인에게 빌려 준 돈을 못 받고 높은 이자는 꼬박꼬박 줘야했던 그녀는 우울했다. 명동에서 활기찼던 아베마리아, 음대생이던 그녀는 많이 시리고 아팠다. 절약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삶이 지쳐갔다.

그녀는 기도했다. 울 수 없는 절망으로 찬송을 불렀다. 강한 자존심이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귀국했다. 외교관인 된 딸과 남편의 직장 때문이었다. 아들만 혼자 캔버라에서 대학을 다녔다. 꼭 10년이 되어 시드니로 돌아와 나는 그녀부터 만났다. 많이 뚱뚱해져 있었다. 여전한 이멜다 머리에 세련된 손톱이 나를 안심시켰다. 매주 수요일이면 아베마리아는 노인들의 급식을 책임진다. 벌써 십년이 좀 지났다고 한다. 메뉴를 정하고, 시장을 보고 만든다. 때로 보조해주는 손이 없기도 하고, 제법 돈이 들기도 한다고 한다. 매주 50명에서 70명이다.

이름 없이 격려와 칭찬도 받기를 거부하고 십 년을 지내고 있다는 것은 이민자로서 살아온 시련의 경험이 준 베풂이고, 기독인으로서 해야 할 소명이라고 했다. 그녀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아들들은 결혼해 자녀를 둔,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우리들의 청춘이 숨 쉬던 명동의 분위기를 가진 아베마리아!

그녀가 이름없는 봉사자가 되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다. 따수운 커피에 달콤한 케익을 먹고 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의 돈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주기도문과 하루 먹을 수 있다면 족하다. 베풀 수 있는 나머지가 있다면 감사라고 한다. 살아온 날의 화려함을 함께 경험했던 그 푸르던 날의 거억 들이 그저 생각에서도 사라지고 있지만 이민 30여년에 흔적은 몸으로 감사한다.

아름다운 노년이다. 그녀의 작은 베란다로 다가오는 붉은 노을을 사진 찍어 보낸 그 다음 글에는 “언니, 모든 것은 감사한거지? 우리는 지금도 아름다운 거지? “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럼, 우린 잘 해내고 있는 거야!

©TOP 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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